Records/Scribbling

세계의 건축가들

포근 2010. 9. 10. 02:22

Claude-Nicolas Ledoux :1736-1806:프랑스
 

"예술적 효과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피라미드형, 평면, 그리고 컨트라스트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1952년, 예술사가 에밀 카우프만(Emile Kaufmann)의 저서 「3인의 혁명적 건축가 불레, 르두, 르꿰」가 발표된 이래, 프랑스가 신고전주의건축으로 이행할 때 3인이 전개한 혁명적인 독자적 양식이, 근대건축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에띠엔느 루이 불레(Étienne Louis Boullée:1728-1799), 끌로드 니꼴라 르두, 쟝 쟈끄 르꿰(Jean Jacque Lequeu:1757-1825)라는 세 인물 중에서, 비교적 구체적인 작품을 만들 기회를 얻었을 만큼 행복했으며,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기를 맞아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사람이 르두였다. 말메강에 가까운 드라망에서 태어나 어릴 때 파리로 왔다. 당초에는 화가를 지망하여 꼴레쥬 드 보베에게 사사했으나, 15세기가 되었을 무렵, 아카데믹한 회화공부를 포기하고 전쟁화 등을 그리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후 본격적으로 건축가를 지망하여, 당시 고전주의 건축의 제일인자였던 브론델(Jacques-Francois Blondel)이 이끌던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이전에 해오던 고전연구를 중단하고, 이탈리아의 팔라디오라든가, 영국의 이니고 존즈(Inigo Jones) 등등에 관심을 두었다. 이들 건축가들! 
의 작품들에 공통된 것은, 간결한 형태와 선 이였던 바, 이것이 르두의 후기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된다. 1762년경부터 설계활동을 시작하여, 초기 대표작인 「오뗄 달윌(Hôtel d'Halluyl)을 다루었던 1766년경에 르두의 생애를 크게 좌우했던 뒤 바리(Mme. du Barry)부인을 알게되어, 그녀의 후원을 얻게 되었으며, 1771년에는 그녀의 의뢰에 따라 주택을 짓게 되었다. 1773년 왕립건축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뒤 바리부인의 알선으로 루이 15세의 건축가가 되었다. 1774년에는 알게 스낭에 왕립제염소(王立製염所) 감사역에 임명되었기에 그의 대표작이 된 알게 스낭의 「제염소」(1773-79)를 짓게 되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후에는 왕실과의 문제가 되어, 1793년에 체포되어 사형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1795년에 석방되었다. 이어 다시 건축활동을 시작했으나 스스로가 건축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알게 스낭의 제염소 주변에 공상적 건축을 설계하여 하나의 도시를 구상했으며, 「예술, 풍속, 법제와의 관계로 고찰해 본 건축」이라는 장대한 계획안을 출판하기 위하여 혁명후 얼마간의 재산을 탕진하고선 2년후에 어수선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Thormas Jefferson:1743-1826:미국 

"제가 예술의 문제에 대한 열광자라는 것은 알고계시지요. 예술, 특히 건축은 사회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서라고 생각합니다. 건물, 그것이 건축되어있는 나라의 문화적 가치를 반영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그 나라의 이상을 높이며, 시민의 취향을 향상시키며, 세계의 눈길 속에서 존경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퍼슨이 미합중국의 3대 대통령 이였으며, 또 독립선언문의 기초자이기도 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대정치가였던 그가 건축가로서 활약했다는 것도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사상가, 과학자로서도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다. 제퍼슨은, 윌리엄 & 데리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으며, 뒤이어 식민지의회 의원, 버지니아주 지사를 역임했다. 게다가 1785-89년에는 프랑스대사로 근무하였고, 1790년에는 워싱턴 대통령 휘하에서 국무장관이 되었다. 1800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801-09년까지 대통령으로 연임했다. 제퍼슨은 말하자면 아마추어 건축가였다. 그는 건축에 관한 고등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일찍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건축가 팔라디오에게 흥미를 느꼈다. 또, 프랑스 대사로 근무중 프랑스 건축에 대한 연구를 동시에 진행했으며, 그 성과를 고전주의건축으로 미국에다 실천했던 것이다. 건축활동을 한 것은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의 일이었으나, 그는 「몬티첼로」와 「버지니아대학」이라는 건축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몬티첼로」는 버지니아주 샬롯트빌에 건설된 제퍼슨 자신의 집이었으나, 동시에 농장? 
?중심으로한 건축이기도 했다. 제퍼슨식 민주주의로 알려져 있는 중산자영농을 중심으로 삼은 정치이상을 그의 자택에서 실천한 것이다. 또, 「버지니아대학」은 최초의 주립대학으로서, 이것을 설계 건설함과 아울러, 이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는 독특한 교육내용으로 커리큘럼을 편성하여, 대학교육의 한 기반을 구축하여 주었다. 제퍼슨은, 정치가로서도, 건축가로서도, 늘 실천하는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Karl Friedrich Schinkel:1781-1841:독일 

"모든 중요한 시대에는 그 양식이 건축에 반영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대의 필연적인 양식을 발견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과연 우리는, 항상 다른 시대의 양식을 모방하여야만 하는가? 각 시대양식의 순수한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공헌이라면, 다른 시대가 거둔 최선의 성과와 모순되지 않는 보편적인 순수양식을 사유(思유) 하는 것은 보다 더 커다란 공헌이 아닐까?" 

쉰켈은 근대건축가라기 보다, 오히려 19세기 전반 양식건축 시대의 거장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전주의의 건축적 업적을 남겼으며, 말하자면 전근대적인 작품의 건축가였으나 그의 건축에 대한 자세는 극히 근대적인 것이었다. 베를린 고등건축학교에서, 길리부자(David Gilly;1748-1808, Friedrich Gilly;1771-1800) 문하에서 건축을 배운 쉰켈은, 고전 건축 연구를 위해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그런데, 그는 고전건축보다 오히려 중세 건축에 강한 흥미를 보여주었다. 쉰켈은, 중세 건축 중에 「아름다움과 함께, 합목적성과 견고성이 부여되어 있다」라는 것에 눈뜨게 되어, 합목적성 그것이 건축의 기본원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베를린 주위병소(Neue Wache)」(1818), 「왕립극장(Theatre)」(1821)「구(舊)박물관(old Museum)」(1828)등등의 그리스풍 고전주의 건축의 걸작 외에, 계획안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딕 적인 「루이제여왕묘)」 등을 제안했을 때, 쉰켈의 중세건축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또, 영국을 여행하여 신흥 공장건축을 보았을 때, 「소박한 기능공이 만든 벽돌의 순수한 매스, 건축에는 없는 솔직한 실용품」이? 
?찬미하고 있다. 쉰켈로서는, 양식건축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건축의 본질에 관한 이해는 충분했다 하더라도, 작가로서의 업적은 양식건축에 지나지 않았다. 즉, 그는 건축근대화의 과도기에 있어, 소위 「언행불일치의 건축가」라는 것은, 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는 아니며, 그 보다도 진보적인 근대건축으로의 지향이 쉰켈에게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쉰켈의 합목적인 건축에 대한 제언은, 특히 평면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했었으며 이는 젬퍼로 이어져, 근대건축론으로 집약되어 개화된다. 



Pierre Francois Henri Labrouste :1801-1875:프랑스 

"입체성(Solidity)이라는 것은, 매스라기 보다는 각재료를 조합하여 건물을 짓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라브루스뜨는 파리에서 태어나, 에꼴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고, 로마대상을 획득하여 1824-1830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유학했다. 그는 에꼴 데 보자르의 우등생이었다. 로마대상이라는 것은 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의 학생에게 주어지는 영예로 로마 메디치가(家)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유학할 기회가 부여된다. 에꼴 데 보자르의 교육은 신고전주의적인 아카데미즘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건축양식상의 정교한 모방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대상도, 고전양식의 연구를 위하여, 이탈리아에 유학시켜, 그 건축물을 직접 현지에서 찾게 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라브루스뜨는 이탈리아에서 귀국후, 잠시 절충주의 건축에 대표자 중에 하나인 뒤방(Féplix Louis Jacques Duban;1797-1870)과 함께 일했다. 그러나 그후 그는 보자르의 아카데미즘에 반발하여, 건축에 합리적 접근을 시도하여, 근대건축의 귀중한 기초를 쌓았다. 라브루스뜨는, 적극적으로 철제를 건축재료로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라브루스뜨는 조적조 중에 철재 골조를 끼워 넣은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인 파리 「성 즈느비에브(Sainte Genevieve)」(1843-46) 도? 
?活?외관은 르네상스식 석조건축이나 내부는 주철(castiron)아치와 주철기둥으로 조립되어 있다. 또, 파리 「국립도서관」의 증축공사(1862-68)에서도, 주철아치와 주철기둥이 지지 체가 되었으며, 테라코타제 돌을 연속적으로 덮어 형성한 열람실에서도, 기둥에 연결된 철제 서고를 축조시켜 놓고 있다. 근대건축제료로서의 철재의 적극적 사용과, 양식건축시대의 잔재라 해야 할 조적조의 외벽은, 얼핏 기묘한 조합이기는 했으나, 하나의 과도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라브루스뜨의 근대화에 대한 지향이 철골골조로 채용하는 결과가 되었으나, 또한 조적조에서 완전히 탈피할 수는 없다는 시대배경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철제가 주철이었다는 것도, 근대화의 여명기에 볼 수 있는 특징으로, 강철이 새로운 건축재료로 일반화되기에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Gottfried Semper:1803-879:독일 

"발명, 기계 그리고 이론, 이것만이 구조적으로 과학적으로 새로운 형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젬퍼도 쉰켈과 마찬가지로, 근대건축가로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19세기 전반의 양식건축시대 거장의 하나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의 건축적 업적은 본체는, 드레스덴의 「궁정극장」(1832-41), 「쮜리히 공과대학」(859-64), 「빈테르투르시청사」(1867-69), 비엔나의 「부르그 극장(1854-88)등등 이외에도, 수많은 계획안이 있다. 이것들은 그 모두다. 고전주의나 절충주의 건축으로서 전근대적인 작품이었다. 젬퍼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식론으로 알려져 있는 방대한 양의 저서 「공예 및 건축에 있어서의 양식(Der Stil in den technischen und tektonischen künsten)」(1863-63)의 간행이다. 그는 여기서는 조형이론을 전개하여, 예술형식의 성립인자를 목적(기능), 재료, 가공(구조)의 세 가지로 요약했다. 이에, 당시의 미학계로 부터도 주목을 받게되어, 젬퍼는 예술유물론자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꼭 그러한 외적인 요소를 소박하게 유물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항상 외적 인자이외에, 물질을 초월한 생명력이라든가 의지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유기적인 목적체로서의 형식법칙을 주장했다. 그가 지적한 예술론은! 
, 19세기 전반의 양식건축시대에 있어, 건축의 본질적 고찰에 근거를 두어 이야기되던 근대화로의 지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젬퍼는 1823년 괴팅겐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다가, 고전건축에 흥미를 갖게 되어 건축으로 전향했다. 1825년 뮌헨에서 개르트너(Friedrich Von Gärtner:1792-1847)에게 배운 뒤, 이탈리아 및 프랑스를 연구여행했다. 쉰켈의 추천을 얻어, 1834-49년에는 드레스덴공과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848년의 혁명후, 1849-51년엔 파리, 1851-55년에는 런던에 망명했다. 1855년 쮜리히공과대학 교수, 1871년 비엔나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젬퍼는 오페라에 의욕을 불태웠던 음악가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바그너를 위하여, 뮌헨 축제극장의 설계를 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Horatio Greenough 1805-1852 : 미국 

"동물계와 식물계 등 자연계 중에는, 멋대로 한다든지 저절로 된다든지 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물이 우리들의 눈을 끄는 것은, 그 부분이라든가, 어떤 형태나 색채상의 문제가 아니다. 교차된 부분 서로의 조화와 정돈, 또 각 부분이 매스에 종속된다고 하는, 전체와 부분의 관련성 때문이다. 「적응」이라는 법칙이야말로, 모든 구조물 중에 숨어 있는 자연의 기본법칙이다." 

그린노는 조각가다. 그러나 이렇다할 조각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조각가라기 보다도, 오히려 예술비평가로서 그의 우수한 근대사상이 그 후의 미국 미술계에, 그리고 더 나아가 건축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간과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일반적으로 설리반의 말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는 경구는 그린노의 기능주의 이론에 정리되어 있던 것으로, 설리반을 중심으로 한 시카고학파 건축가들에 의해, 구체적인 운동이 전개되기 4반세기 전에, 그린노는 이미 이러한 사상을 확립했다. 

그의 해안은 경탄할 만한 것이다. 그린노는, "오늘날, 미국인은 그리스와 로마 건축의 고전적 양식을 잘못 모방하고 있다. 더구나 잘못된 모방이 잘된 것으로 오해되고 있을 정도로 그 잘못은 심각하다."라는 논조로, 미국 고전주의 건축을 매도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에 떠 있는 배를 보라. 아카데미의 형식주의와 그리스의 모방에서 어떻게 이러한 멋진 구조가 만들어질까? 이것은 바람과 파도의 출렁임 중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구조법칙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자연원리의 핵심에 이르고자 했던 진지한 연구의 성과다"라고 미국 기술의 소산인 요트와 기계류를 찬미한다. 

또, "기관차를 그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까지 깊이 파고들어 단순화시킨 사람들은, 그 순간부터 완전히 그리스건축의 모방을 행하는 사람들보다 한층 아테네인들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린노는,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후, 이탈리아의 조각가 바르똘리니 문하로 달려가, 플로렌스에서 작가활동을 했다. 25년에 걸친 유럽에서의 생활중, 그 봉건적인 유럽보다는 활동적인 미국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했던 것이다. 



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 : 1812-1852 : 영국 

"좋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직한 장인인 동시에, 착실한 기독교인 되어야 한다." 

19세기 사회에서 기독교 교회가 무력해짐에 따라 종교적 통일체로서의 사회가 붕괴되어 가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던 옥스퍼드 운동과 캠브리지 캠딘협회라는 종교활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영향을 배경으로 삼아 성행했던 것이 1830년대의 고딕부흥이었다. 종래의 절충주의적 고전양식, 특히 후기 조지아양식을 비판하고, 그와 대체될 양식으로, 고딕양식의 재평가를 목표로 삼아 진행되었던 건축운동의, 지도적 인물이 퓨진이었다. 퓨진은 찰스 베리경(Sir Charles Barry)이 설계했던 영국 「국회의사당」의 세부설계를 담당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아버지 어거스터스 퓨진은 1798년에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건축가였다. 퓨진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중세의 가구, 식기, 건축장식을 배우며, 건축가로서의 수련을 쌓았다. 그의 생애에는 파란이 많았다.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1831년에 결혼하여, 다음 해 처를 잃었다. 1833년에 재혼하여, 또 다음 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1844년에 두 번째 처도 잃고 말았다. 1849년 세 번째로 결혼했으나 이번에는 퓨진 자신이 발광하여, 1852년에 사망했다. 그의 건축활동은 두 번째 ? 
냅?소생인, 에드워드 웰비 퓨진에 의해 계승된다. 퓨진은 고딕건축을 조그만한 디테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소위 장인적인 수법을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기독교건축의 진리」(1841) 와 「영국기독교건축의 부활을 위한 변호」(1843) 등의 저작을 통해,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건축작품에는, 19세기 고딕교회의 기본이 되었던 작품이 많아, 「세인트 치이들교회(Cheadle church)」(1841-46), 「노팅검 대성당」(1842-49) 「성어거스틴교회(1846-51)」등이 유명하다. 퓨진이 중세건축을 중세의 시대정신(der Zeitgeist)과 연결시켜 생각했던 사상은 후에 옥스퍼드운동의 영향하에 대학생활을 보냈던 러스킨에 의해 계승된다. 



Eugene Emmanuel Viollet-le-Duc : 1814-1879 : 프랑스 

"건축물의 수복이라는 것은, 그 건축물을, 일찍이 과거 어떤 시기에도 존재했던 적은 없었던 정도로 하나의 정비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뷔올레 르 뒤끄는 건축가로의 자신의 작품보다도 오히려 수복, 복원 작품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므로 그를 건축복원가로 부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를 편력하며, 고대와 중세의 건축을 연구했다. 1840년 이후, 그는 중세건축의 복원공사에 종사하면서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파리의 「쎙뜨 샤벨(Sainte Chaplle)」,「노뜨르 담(Notre Dame de Paris)」을 비롯하여, 렝스와 아미엥의 대성당, 삐에르퐁의 성 등, 프랑스 중세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차례로 복원해 갔다. 

그런데, 뷔올레 르 뒤끄의 복원론은 앞에도 예시되어 있듯이 약간 특이하다. 그것은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인 논리라 말할 수 있다. 건축물을 원형으로 되돌린다는 일반적인 복원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건축물을 당초의 설계자 마저 의도하지 않았던 상태로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 정말로 한층 더 이상적인 상태인가는 중대한 문제이지만 그러한 특이한 신념에 근거하여 복원을 행했던 뷔올레 르 뒤끄는 건축복원가이기 보다는 건축의 창조를 목적으로 한 건축가였다. 결국, 그의 중세건축복원사업은 많은 대건축물이 아름다운 형태로 단장되고 정돈되었으나, 그것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지 않았다는 새로운 문제를 많이 야기시키기도 했다. 뷔올레 르 뒤끄는 또한, 중세건축의 연구자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 결과, 고딕건축애는 구조상이 필요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디테일은 없다는 일반적인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에 의하면 리브와 볼트의 전체 하중은 리브가 부담하기 때문에 볼트 자체는 리브의 사이를 메우는 패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볼트는 전시대보다 훨씬 얇게 만들어졌으며, 가쇄(가쇄)도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고방식은 오랫동안 신봉되었다. 리브는 힘을 받는 뼈대로서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시각적 안정감을 갖게 한다고 해도, 역학적으로는 오히려 볼트에 의해 지지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뷔올레 르 뒤끄의 이론은 크게 수정되었다. 



John Ruskln : 1819-1900 : 영국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이미 만들어진 것이 지닌 아름다움보다도 건축에 있어서 선택과 그것을 만든 사람이다. 그의 작업보다도 장인의 열정과 사상이 문제다 그의 작업은 늘 불완전함에 지나지 않겠으나 그의 사상과 정열은 진실하고 깊이가 있다." 

러스킨은 건축가가 아니다 경제학자이자, 사상가이자, 미학자이며 예술비평가인 그가 언제부터인가 근대건축 흐름의 출발점에 등장하게 된 것은 영국에서 일어났던 예술공예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의 근대적 의의 때문이다. 그가 태어났던 19세기 초무렵에는 영국이 유럽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산업혁명이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었다. 

자연은 파괴되었으며, 산업혁명이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었다. 자연은 파괴되었으며, 기계생산에 의한 조약품 - 기계 그 자체가 아직 유치하고 조악했다. - 이 범람하여 수공작업에 의한 기술이 현저하게 저하되기 시작했었다. 

러스킨은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 재학중에 「건축의 시」를 쓰는 등, 일찍부터 미술, 건축에 강한 관심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해인 1843년에는, 대저서 「근대화가론(Modern Painters)」제1권을 간행(1860)년에 전5권이 완결)했다. 건축에 관한 저술에는 「건축의 일곱가지등(Seven Lamps of Architecture)(1851-55)」등이 있다. 이 책들은 모두 중세의 미술, 건축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들이 민중의 종교, 도덕, 사회관습을 표현한 것이라 하여, 그의 예술철학을 확립했다. 러스킨의 예술론은 체계적이며, 현학적이지 않은 것으로 일컬어지며, 논리적인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산업혁명을 계기로 대두되던 기계시대에 기계 그것을 부정하고자 주장한 것이었다. "수공예의 우수함이 소멸해 갔다는 것은 모조리 특권계급의 이윤추구 목적에 봉사하는 기계가 원인이다."라고 주장하는 러스킨은 기계를 말살하고자 정면으로 도전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 원흉으로 인정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혁신시켜야 한다고 제창했다. 근대적인 생산방식에 반대했던 이 사상은 근대예술운동의 효시중에 하나임에는 틀? 
꼭?없으나 동시에 그것은 반근대적인 성향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Charles Garnier : 1825-1898 : 프랑스 

"우리가 그리스를 연구하고, 고대 기념물을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곳에 내재된 원칙을 구하며 동시에 감정과 의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을 파악하며 동시에 창조하는 것이다." 

파리 오페라좌의 설계로 이름난 샤를르 갸르니에는 파리 아래쪽 므프딸가 철물점 집에서 태어났다. 교육에 대한 부친의 열의를 힘입어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 르바의 아틀리에에서 수업했다. 갸르니에는 1848년 약관 23세 「기술 및 예술학원」을 테마로 했던 로마대상을 획득하여 이탈리아 각지를 순회했다. 아마 그리스 본토에도 발을 들여놓았을 것으로 고대의 건축에 실제로 접해 "처음이었지만, 내자신 속에 감명을 받았던 것은 정신만은 아니었다. 혼과 마음을 빼앗겨 두 눈에서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귀국해서 바뤼의 문하에서 근무하다가 1860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공포된 오페라좌 설계경기에 응모하였다. 

171편의 응모안 중에서 1차 심사에서는 5인의 안이 선택되었으며, 갸르니에의 안은 그중 5위였다. 2차 심사에서 최종적으로 갸르니예의 안을 채택하기로 결정되어 이듬해 1862년부터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실제로 이 건물이 완성된 것은 파리 꼬뮌의 격동을 거친 1875년으로서 이때 전례가 없이 장엄한 오페라의 전당은 새로운 건축양식을 창출했다고 절찬되었으며, 동시에 보수적인 사람들에게선 온갖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의 건축 오더를 아주 벗어난 갸르니에 독자적인 양식막?열주와 아케이드 복합기둥을 사용하여 고전건축의 어휘를 중합시켜 사용하므로서 건축 그것은 건축가의 강열한 개성을 표현하고 있다. "장식예술은 독립되고 자유로워야 하며 고정된 법칙에 종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갸르니에의 말처럼 네오 그레꼬(N대-Greco) 양식 건축을 발전시켜 건축의 양식만이 아니라, 건축가의 조형정신에 있어서도 네오 바로크로 불려야 옳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건축에 시정을 구가하고 건축에 정열을 실체화하고자 했던 갸르니에의 창작의욕은 당시의 정충주의와는 달랐으며 보다 극적인 건축을 목표로 했던 것이었다. 오페라좌 후에도 몬떼까를로의 카지노(1882)와 뵛뗄르의 온천(1884) 등에 있어서도 그 목표는 바뀌지 않았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개인의 아뜰리에도 갖지 않았던 고고(孤高)한 건축가였다. 



Alexander Gustave Eiffel : 1832-1923 : 프랑스 

"건축미학의 제1원리는 모뉴멘트의 윤곽이 완전히 그 목적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을 규정한다. 탑에 관해서 나는 무엇을 고려에 넣어야 했던가? 그것은 바람에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조계산을 통해 결정된 네 곳의 외측기둥이 갖는 곡선이 강력한 힘과 아름다움의 커다란 인상을 주고 있음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재간의 무수히 많은 빈틈으로 강풍이라는 폭력에 대해 건물의 안전성을 주어 불안한 입면을 위험할 것이 전혀 없도록 하는 끊임없는 배려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눈으로 구조체 전체의 대담함을 전달하여 주기 때문이다." 

1889년,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만국박람회를 위해 세워져 설계자의 이름이 붙은 철골조의 에펠탑은 지금도 파리시가의 모뉴멘트로 당당히 서 있다. 에펠은 건축가가 아니고 구조기술자이다. 그는 주로 철도관계의 시설이라든가 교량에 볼만한 업적이 많다. 

그는 에펠탑을 건설하기 전에 2가지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모두가 철골교량으로서, 두로강의 「마리아 삐아교」(1875)와 갸라비 근교의 「뜨뤼엘교」(1884)가 그것이다. 모두 150m가 넘는 커다란 스팬에 철골아치로 가설한 것이나 그 아치는 비교적 조그마한 압연강을 리벳으로 조립, 구축한 것이었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균질의 압연강재가 대량으로 생산되어 싼값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생산체제가 정비되어 있었다. 또 생산된 강제는 치수가 규격화되어 있어 리벳접착이 손쉽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이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 대구조물의 설계를 가능케 했음이 확실하다. 에펠탑은 강재의 대량공급과 작가 자신의 풍부한 기술적 경험을 바탕으로 실현된 것이었다. 지상 300m라는 높이에 도전하므로서, 우리는 부감(俯瞰)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에펠이 이 탑의 형체를 결정함에 있어 단순한 합리성에 바탕을 둔 결과라고는 할 수 없는 그의 미적 직관이 역학적으로 보증되었다는 것이다. 에펠탑에는 구조부제와는 별도로 주철로된 장식이 부가되어 있어 우아한 인상을 자아내고 있다. 에펠을 구조건축 기술가로 부르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William Morris : 1834-1896 : 영국 

"예술이 성장해가는 것이라면, 금후에 민중을 위한 민중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 예술은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또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어야 한다." 

러스킨의 예술공예에 대한 사상을 실행에 옮긴이가 모리스다. 그도 역시 건축가는 아니었으며, 공예가이자, 화가이자, 시인 그리고 사상가이다. 모리스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나중에 작시, 미술, 공예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특히 중세의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있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도래된 기계들을 인간으로부터 노동의 기쁨을 앗아간 것으로 증오하여 수공예에 의해 기쁘면서도 노동에 참가하여야 한다는 윤리를 강조, 스스로도 실천했다. 모리스의 예술론은 그 핵심부를 러스킨의 것에서 구하고 있으나, 러스킨의 예술론이 체계적 논리적임에 비하여 단편적 정열적으로 이야기되어 있다. 그러나 모리스도 공예가로서 수많은 수공예품을 직접 손으로 다루어, 작품을 통해 수많은 지지자를 얻었다. 그는 라파엘(前派)의 예술가들을 모아 「모리스, 마샬, 포크너상회(Morris, Marshall, Faulkner Co.)」(나중에 모리스상회로 개칭됨)를 설립했다. 

이 조직을 통해 그들은 가구, 금속세공, 직물, 벽지 및 스테인드 글라스 등을 기계를 사용치 않고 손으로 제조, 판매하므로서 예술공예품의 성실함과 품위의 향상을 꾀했다. 모리스를 중심한 이 예술운동은 「아트 앤 크래프트 무브먼트」로 불리며 영국에서는 물론, 유럽대륙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유럽에서는 벨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아르누보(Art Nouveau)」로 개화된다. 

「아트 앤 크래프트 무브먼트」는 근대화 출발점에 있어 기계생산의 전면부정이라는 전근대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나 저속함과 혼미함을 계속하던 19세기에 양식주의가 전성기를 누리던 건축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어 건축가를 비롯하여 예술에 관련된 사람들을 각성시켰다는 점에서 그 공적은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건축가가 아니었던 모리스가 늘 근대건축사 모두(冒頭)에 등장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모리스도 한때 건축가를 지망하여 건축가 스트리트(G. E. street)의 문하에서 수업했던 바가 있으나 그 자신 건축작품은 남기지는 않았다. 필립 웹(Philip Webb)이 설계했던 모리스의 자택인 세칭 「빨간 집(Red House)」가 널리 알려져 있다. 



Herry Hobson Richardson : 1838-1886 : 미국 

"창은 건축의 외관을 위한 것이라 해도 상관은 없다. 그러나 오히려, 실내장식의 한 부분으로서 보다 중요하다." 

리차드슨은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한 후, 파리로 건너가 에꼴 데 보자르에서 더 공부했다. 헌트(Richard Morris Hunt : 1827-95)에 이어, 에꼴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던 두 번째 미국인 건축가였다. 그가 유학 중에 모국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발발하여 리차드슨의 집은 재산을 잃게 되었고, 그 자신 파리에서 직업을 구해야 했었다. 리차드슨은 라브루스뜨의 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귀국의 시기를 기다렸다. 

1865년 귀국한 리차드슨은 다음해 보스톤의 「퍼스트 유니테리언교회」 설계경기에 당선하여 화려하게 건축가의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872년, 역시 설계경기에서 당선된 보스톤의 「트리니티교회」를 준공시켜 소위 리차드슨의 로마네 스크양식을 확립했다. 크게 뚫린 로마네스크식 아치의 현관, 거친 돌쌓기의 중후한 디자인으로 미국의 건축을 국제적 수준에까지 높여 놓았다. 리차드슨의 로마네스크는 시카고에서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가운데 하나인 「마샬 필드 홀세일스토어」(1885-87)가 건축되어 소위 시카고파(the Chicago School)발전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리차드슨은 공공적 건축작품과 상업적 건축뿐만이 아니라, 주택건축에 있어서도 커다란 업적을 남기고 있다. 

1880년대에 뉴잉글랜드지방의 전형적인 농가를 바탕으로 삼아, 몇 개의 주택을 지었다. 비대칭의 자유로운 평면과 그곳에서 산출되는 재료의 색채를 이용하여 형태적으로 자유롭고 넓찍넓찍한 주택을 지었다. 

그것들은 주변의 환경에 어울렸던 것이었다. 결국, 리차드슨은 19세기의 유럽의 건축과는 상반되는 두 가지 지배적인 경향 모두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에꼴 데 보자르의 아카데미적 건축교육의 결과인 좌우대칭, 명확한 윤곽, 단순한 색채의 고전주의적 수법이다. 

또 하나는 영국의 빅토리안 고딕의 비대칭, 복잡한 윤곽과 조형, 강한 색조의 수법이다. 대표작품에는 위에 든 것 외에도 「클레인도서관」, 「얼바니예배당」, 피츠버그의 재판소와 형무소, 「스토튼저택」 등등이 있다. 



Otto Wagner : 1841-1918 : 오스트리아 

"예술의 유일한 지배자는 필요다." 

근대건축의 시조로 추앙되고 있는 바그너의 어구로 "Artis sola domina necessitas"라는 라틴어 문장과 함께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대표작 「근대건축(Moderne Architektur)」(1896)에서 근대건축의 원칙을 간결하게 설명했다. 즉, ① 합목적적 건축 ② 재료의 솔직함 ③ 구조적 합리성 ④ 그리고 이상의 세 가지로부터 생겨난 필연적인 형태가 '필요양식'이라 했다. 이 원칙은, 분명히 양식주의 건축시대의 거장인 젬퍼의 건축이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또 건축에 있어 기능충족이라는 중요성이 건축의 역사보다, 오랜 원칙이기도 했다. 그러나, 건축이 본질적으로 완전히 그릇된 방향을 따르고 있던 19세기말엽에 새삼스레 정상적인 루트로 건축을 되돌리고자 했던 바그너의 공적은 크다. 그러나 그의 '필요양식'이라는 개념은 그릇된 기능주의 이론이 탄생하는 단서가 되었다. 

물론 바그너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겠으나 기능성, 합리성추구의 필연적 귀결로서 '필요양식'은 곧잘 오해되었던 것이다. 결국, 건축의 형태는 기능성의 추구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는 없는 것이나 건축가가 형태의 결정이라는 중책을 포기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바그너는 비엔나공과대학을 1857년에 졸업한 후에도 베를린 건축학원, 비엔나대학건축학부에서 공부했고, 1863년에 독립하여 건축가로서의 활동을 개시했다. 

초기에 있어서는 고전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남겼으나 비엔나에서 「비엔나우편저금국」과 「슈타인호프예배당」에서 그의 주장을 실천에 옮겼다. 본서에도 수록된 「슈타인호프예배당」은 고전적인 돔이 덮였으며, 벽면에도 많은 장식이 사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근대건축의 이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으로서 바그너를 언행불일치의 건축가로 평하는 의견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식이 소위 기존양식의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고 그 자신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의 주장과 작가로서의 성과가 주의를 일관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미루어보면 언행이 불일치했을지언정, 올바른 근대건축의 선구자로서 높게 평가해야 한다. 「현대는 르네상스(再生)가 아니라 네상스(新生)이다」라고 바그너는 말했다 



John Welborn Root : 1850-1891 : 미국 

"건축에 섬세한 장식을 지나치게 사용한다는 것은 쓸모없다기 보다도 오히려 그릇된 것이다. 건물에는 매스와 프로포션으로, 보다 본질적으로, 근대 문명에 감춰진 위대한 불변의 힘에 관한 사고를 전달하도록 해야 한다." 

루트는 설리반, 번햄(Daniel Hudson Burnham), 젠니(William Le Baron Jenny), 홀라버드(William Holabird)등과 함께 시카고파(Chicalgo School)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다. 

그는 번햄과 공동으로 1873년에서 1891년에 사망할 때까지 정력적으로 설계활동을 전개하여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루트는 조지아 애틀랜타에 가까운 람프킨에서 유복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기를 영국의 리버풀에서 보냈으며 1869년에는 옥스포트대학에 입학했으나 졸업을 앞두고 귀국해버렸다. 

뉴욕의 시티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 여기서도 중퇴했으며, 렌위크(James Renwick)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1871년, 대화재 후의 사카고로 가 카터, 드레이크와 윗(Carter, Drake, Wight) 사무소에 근무했다. 여기서 그는 번햄을 만나 친교를 맺게 되어, 1875년 공동으로 사무소를 열게 되었다. 시카고파의 건축가들이 경쟁적으로 시카고의 거리를 고층건물로 메꿔가는 시기에 루트도 또한 크게 활약했다. 번햄 루트의 사무실의 대표작은, 「모나독 빌딩」과 「릴라이언스」빌딩이다. 번햄은 건축가이기보다는 오히려 사업가로서 경영적 수완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작품은 루트의 작품이라고 보아도 좋다. 1891년에 준공된 「모나독 빌딩」은 돌과 벽돌로 쌓은 조적조로 17층이라는 높이의 이색적인 고층건물이다. 전혀 장식이 사용되지 않은 대신에 외벽의 기단부가 몹시 외측으로 튀어나와 있으며, 개구부의 조각적 깊이가 특징이며, 채광을 위해 수직으로 연속된 베이 윈도우(Bay Window)를 내어 외음영이 짙게 형성된다는 등, 전체적으로 조각적인 조형을 이루고 있다. 「릴라이언스 빌딩」은 시카고파의 건축어휘를 모두 갖춘 전형? 
岵?건축이었으나 루트의 사후, 아트우드에 의해 준공되었다. 루트는 1893년의 시카고 박람회를 위한 전체계획의 스케치를 남기고 급서했다. 



Antonio Gaudi : 1852-1926 : 까딸로니아 

"자연은 신이 창조하신 건축이므로 인간의 건축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가우디는 까딸로니아에서 태어난 이색적인 건축가다. 그의 건축에는 고대그리스와 로마의 고전건축이라든가 고딕등 중세건축의 여러 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19세기의 절충양식건축처럼 기존의 양식을 모방한 것은 아求? 

가우디는 인간의 건축은 직선적이나 신의 건축은 곡선적이라 했다. 그는 곡선과 곡면을 사용하여 유기적인 구조체를 창조해 냈다. 그러므로서 아르누보의 건축가들이 가구라든가 난간 등 외벽에 장식적으로 곡선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건물전체가 복잡한 곡면으로 구성되었다. 가우디는 이렇게 하므로서 자연주의적인 개념에 투철한 태도를 견지하여, 환상적인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영국의 건축사가 페브스너(Nikolaus Pevsner)는 가우디를 일컬어 "19세기 후기의 파이오니어들과는 매우 다른 배경을 갖고 있어, 근대운동이 따랐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지향했던 하나의 아웃사이더로서 그에게 어떤 역사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은, 그 누구라도 혼란에 빠지게 한다"고 쓰고 있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때, 철학이라든가 미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학생시대에 벌써 비야르(Villar)라든가 퐁뜨세레(Fontsère)의 조수로 근무하며, 설계활동에 참가했다. 

1878년 졸업하던 해에는 「비센스저택」을 설계하고 색채가 풍부한 타일로 장식했다. 1883년, 그는 비야르가 네오고딕양식으로 설계하고 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책무를 인계 받게 되었으나 건설중에 있던 설계도를 모조리 바꿔 그의 대표작품을 이루었다. 

그의 필생의 작업이 된 이 교회는 현재도 아직 공사중이다. 가우디의 공상성, 환상성이 풍부한 건축은, 공포감을 자아낼 듯이 그로테스크한 것과 목가적 요소를 지닌 판타스틱한 것이 늘 함께 했으나, 조각적 조형시대에 해당하는 초기와 1900년 이후 구조적 조형시기에 해당하는 후기의 두시기로 나눌 수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교회」의 트란셉트와 「구엘공원」(1900-14), 「까사밀라」(1905-10)등 그의 대표작품은 모두 후기의 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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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drik Petrus Berlage : 1854-1934 : 네덜란드 

"건축가의 임무는 파사드의 스케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며,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베를라헤는 쮜리히공예학교에서 공부한 후,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를 여행하고, 1882년 귀국했다. 

그해 암스테르담에서 더 산더르스(Th, Sanders)와 공동으로 사무소를 개설하여, 이탈리아전성기 르네상스양식의 백화점 등을 설계했다. 1889년에 독립된 사무소를 내었다. 그의 대표작은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1903)인데 이는 1897년 현상설계경기에서 입상한 것이다. 

실제로 시공되었을 때 베를라헤는 그 디테일에 대폭적인 변경을 가하고 있다. 벽돌 외에 담색(淡色)의 돌을 사용하여 특징 있는 마감을 보여주며, 또 내부에서 철강재 가구식구조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다. 그는 건축의 문제를 정확하게 자각하여 재료와 구조에 대해서는 장인적인 어프로치를 지향했다. 금세기 초반 네덜란드에서 의욕적인 근대건축이 추진되었던 것은 로테르담을 중심으로 한 구성주의(Compositionalism)의 인물들이 전개한 것이었다. 구성파는 로테르담파(Rotter-dam School)로도 불리고 있다. 대조적으로 암스테르담의 건축가들은 오히려 지역성에 입각한 전통적 건축을 중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이를 로테르담파에 대하여 암스테르담파(Amsterdam School)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베를라헤는 암스테르담의 근대건축발전을 위해 있는 힘을 다했다. 그는 19세기 절충주의에 반대하여 어떠한 역사적 양식도 배제한다는 태도였으나 중량감 있는 로마네스크건축에는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반원형 아치와 육중한 벽면은 그의 건축적 특징이다. 이는 일설에 따르면 미국을 여행하면서 받은 리차드슨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외에, 「암스테르담 다이아몬드공의집」(1899-1900), 런던의 「네덜란드 파빌리언」(1919) 「헤이그 시립박물관」(1919-34) 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도시계획가로서도 업적이 많다. 헤이그(1908), 로테르담(1919), 유틀레흐트(1921)의 도시계획, 암스테르담남부의 거주지역계획 등에 손을 대기도 했다. 수많은 저서와 강연으로 네덜란드 건축계에 끼친 영향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Louis Herry Sullivan : 1856-1924 : 미국 

"우리가, 잘 된 형태로 적나라한 아름다움의 건축을 만들고자 한결같이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서, 잠시 일체 장식을 사용치 않기로 한다면, 현대의 아름다움에 큰 공헌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신대륙 아메리카 시카고에 고층건물이 줄줄이 세워지고 유럽의 기존양식에서 탈피할 때부터 미국의 근대건축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카고에 근대건축을 도래케 한 시카고파(the Chi-cago School)의 운동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했던 사람이 설리반이다. 설리반이 누차 기능주의이론을 표방했던 제1인자로 지목되는 것은 그린노의 사상을 「형태는 기능을 따른?Form Follows function)」라는 구절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보다 잘못 이해되고 있는 슬로건은 없을 것이다. 기능충족이 제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관계가 없으나 이들 기능충족에만 매달렸을 때,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형태라고 이해하는 수많?사람들이 기능절대주의로 치닫고 있다. 그들에게는 풍부한 설리반의 장식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1983년 시카고국박람회에서 설리반이 라이트와 공동으로 디자인한 「교통관」이 무시되고, 동부에서 온 건축가의 고전주의 건축이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는 "미국건축의 근대화는 50년 후퇴하게 되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설리반은 매사추세스공과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의 건축가 프랭크 퍼니스(Frank Fur-ness : 1839-1912)의 문하에서 근무했다. 1874년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게 되었으나, 그곳에서의 교육에 만족할 수 없어 수개월 후 귀국한다. 시카고에서 애들러(Dankmar Adler : 1844-1900)와 공동으로 사무소를 열게된 것은 1881년의 일이다. 애들러와 공동으로 활동한 15년간이 가장 활발하게 활약한 시기로서 다수의 걸작을 만들어 내었다. 시카고에 「오디토리움 빌딩」(1889)을 필두로 세이트 루이스에! 
「카슨 프레이리 스코트백화점」(1899)등을 건설했으며, 이 건물들은 모두 다 시가지에 건설된 마천루로서 그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시카고파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또 그의 묘화기법(描화技法)은 그 자체가 아름다워, 그것이 설리반의 건축을 장식하는 건축인자가 되었다. 



Charles Francis Annesley Voysey : 1857-1941 : 영국 

"현대건축은, 천박할 정도로 공격적인 프로포션, 디테일에 있어선 야바위꾼 같은 극단성, 옆으로 누워 잠자듯이 어색한 창문 등 한탄스러우리만큼 수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치 버릇없는 아이처럼, 우리들은 전통을 파기하고 그것에 등을 돌려 버렸다. 이는 독창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독창성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도 각각의 예술가들에 의해 전통적 형태발전에 기울여지는 어떤 정신적인 것이다." 

1870년경에 융성했던 영국에서의 새로운 주택건축에 대한 움직임은 1900년 전후에 질적으로 양적으로 공히 절정기를 맞이하여, 황하에 예술공예운동이 이룩한 주택, 건축 중에서 한 층 더 빛을 발한 것은 보이지의 백색주택 시리즈였다. 기하학적인 형태를 강조라도 하듯이 장식이 전혀 없는 희고, 평탄한 벽면과 커다란 지붕의 처마, 처마 밑에 배열된 창들의 연속성을 건물전체에 수평방향으로의 운동성을 부여하며, 그 창은 내부 기능에 대응되어 비대칭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보이지건축의 일면성만을 평가한 헤르만 무테시우스는 "보이지의 건축은 거의 유일하게 진정한 현대양식을 지향하고자하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여 보이지와 근대건축과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자신은 근대건축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표시하고 있다. 혹시 보이지건축에서 근대성이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건축적 요소를 단순화시켜감으로써 근대건축의 추상화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인가 한다. 보이지는 예술공예운동에 있어 버나큘라 리바이벌(Vernacular Revival)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버나큘라한 모티브를 독자적인 언어로 승! 
화시키고 있다. 초기의 대표작인 「페리크로프트저택」(1893-94)에서는 에드워드조(朝)의 중소주택을 기본으로 삼고 코트월드지방의 오두막집에 특유한 수평연속창이라든가 파사드의 버트레스 등 버나큘라한 요소를 사용하고 있다. 그 밖에도 「뉴플레이드저」(1898)에서 나타나는 궁형(弓形)의 베이 윈도우도 버나큘라한 건축요소를 단순화시킨 것이다 보이지의 민족적 전통에 대한 집착은 단순한 전통주의자에 의한 전통으로의 회귀와는 달리, 건축가의 개성으로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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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ann Muthesius : 1861-1927 : 독일 

"건축과 그 밖의 공작연맹의 활동영역은 규격화를 향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서, 최초로, 그 영역들은, 일찍이 조화 있는 문화시대에 갖춰져 있던 폭 넓고 일반적인 의의를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무테시우스는 1907년 뮌헨에서 결성된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 약칭 D. W. B)'의 중심인물이었다. 이 D. W. B는 결성 이후 얼마쯤은 파란을 겪었다. 즉, 그 연맹 중에는 규격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과, 개성주의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 두 가지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테시우스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조형은 즉물적(卽物的 : sachlich)으로 형성되도록 유도되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즉, 그는 개인주의적인 조형에는 반대했던 것이다. 

1914년 D. W. B 총회에서, 규격화인가 개성인가 하는 문제가 토의에 붙여져 개성을 중시하는 반 드 벨트와 대결케 되었다. 반 드 벨트는 무테시우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했다. 

"공작연맹 중에 건축가가 있는 한 그리고 그들이 공작연맹의 운명에 영향을 주고 있는 한, 그들은 규준이라든가 규격화하고?하는 제안에 대하여 항의할 것이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열렬한 개인주의자이며, 자유의지를 지닌 창조자인 것이다. 그는 자발적으로 일정한 형식이라든가 규준을 강요하는 원칙들에게는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들의 행동을 고사시킬 듯 한 것은 모조리 믿지 않을 것이다……." 반 드 벨트가 한 말 모두가 우리에게 어떤 시사를 던져준 강연이었으나, D. W. B의 근대화과정에서는 어느 쪽인가 하면 반 드 벨트의 사고방식보다는 오히려 무테시우스의 사고방식을 따르는 방향으로 이행되었다. 무테시우스는 베를린공과대학에서 공부한 후, 파울 발롯트(Paul Wallot)의 사무소에서 근무했으나, 1896-1903년에 걸쳐 런던주재 독일대사관원이 되어, 문화관계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또, 1887-91년에는 헤르만엔데(Hermann Ende, 1829-1907), 뵉크만(Wilhelm Böckmann : 1829-1902)와 함께 일본에서 「일본국회의사당」, 「사법성」 「재판소」 등의 설계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가 전개한 건축가로서의 활동중 가장 중요한 것은, D. W. B에서의 업적이겠으나, 작품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1914년 쾰른에서 개최된 공작연맹전시회 출품작은 근대 ? 
弔愍括?기초로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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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dolf Steiner : 1861-1925 : 오스트리아 

"건축은 창조되어야 한다. 건축에 있어 이야기되는 모든 것-미스테리극에 나타나는 모든 것- 이러한 모든 것을 홀(hall)에 계속 울려 퍼지며, 묘사된 그림과 같은 벽, 자발적으로 긍정하는 수법이며, 이러한 모든 것은 눈에 띠게 마련이다. 그것에 의해 눈은, 그것에 내적으로 관계되고 있는 듯한 것으로서 그러한 것 모두를 이해하게 된다. 각각의 원주는 입으로 그 원주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해주는 것과 같이 인지적 정신과학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확실히 건축이 말하는 것은 과학이며, 예술성이며, 동시에 종교이기 때문에 인지적 태도를 취하는 철학은 통상적인 건축양식을 무시하고 그것 스스로의 건축양식을 만들어내야 했다." 

슈타이너는 일반적으로 철학자이며, 신비학자이며, 괴테 학자로서, 전문적인 건축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젬퍼의 이론에 따라 비엔나에서 몇 가지 건축교육을 받기는 했다. 그는 건축과 미학연구에 철학과 과학의 실험적 지식뿐만 아니라, 수학, 역사학, 문학 등 각각의 지식들도 융합하고자 했다. 슈타이너의 건축적 업적은, 괴테 소사이어티의 메인 센터인 소위「괴테아눔(Goetheanum)」이다. 이 작품은 독일에 부지를 얻어 건설 계획이 몇 번인가 수립되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으며, 1913년 스위스 드르나퍼에 건설되었다. 

1913년에서 1920년에 걸쳐 지어진 것을 제1「괴테아눔」 이라 하며 이는 192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928년에 완성된 제2「괴테아눔」은 슈타이너가 죽고 나서 3년째 되는 해에 준공되었다. 제1「괴테아눔」은 콘크리트와 나무로 구성된 건물로서, 크고 작은 2개의 돔이 교차된 것이었다. 

슈타이너는 여기에서의 의식이 중세의 신비극을 기초로 하여 상연 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커다란 돔 즉, 물리적인 오디토리움과 작은 돔에 의한 정신적 감각적인 무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1「괴테아눔」의 소실 후, 이어서 건설된 제2「괴테아눔」은 첫 번째 것보다 훨씬 큰 오디토리움 건축으로서, 철근 콘크리트 조로 만들어 졌다. 첫 번째 작품 보다 신비스러운 조형은 아니었으나, 조각적 건축물로서 완성되었다. 이 「괴테아눔」의 조형은 그의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삼아 이해해야 할 것이다. 



Victor Horta : 1861-1947 : 벨기에 

"건축은 생명을 지닌 것이라 생각하며 묘사해야 한다. 또, 생명을 지닌 것과 같이 복잡함과 유기성을 지니게 해야 한다." 

1893년, 최초의 아르누보양식적 건물로서 「따셀저택」이 브뤼셀에 완공된 이래, 빅또르 오르따의 이름도 아르누보 건축가로서 세기말의 유럽건축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프러시아 동부 평원도시인 간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오르따는 파리의 건축장식가 뒤빗송의 아뜰리에와 브뤼셀예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1885년에 예술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오르따가 스승으로서 평생에 존경하게 되는 알퐁스 바라의 문하에서 일하게 된다. 당시의 벨기에도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다름없이 절충주의에 지배되고 있었으므로, 젊은 날의 오르따도 열심히 역사적 양식을 마스터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역사적 양식의 흐름에만 만족할 수 없었던 오르따는 몇 개의 양식주의적 작품을 만든 후, 5년에 걸친 작품년보상의 공백기 동안에 '여러 양식들의 인습적인 언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언어에 의한 건축'으로서 소위 '오르따 곡선'을 구사하여, 독자적인 건축양식을 다듬어 「따셀저택」에 있어 한숨에 개화시키게 되었다. 

아르누보적인 시도가 평면적인 장식이라든가 외관의 모방에 빠지기 쉽다는 위험성도 갖고 있으나, 생활양식의 상태 그것으로부터 출발했던 오르따의 미학적 모험은, 유동적인 생활행위와 공간적인 유동성을 조화시키며, 게다가 구조체와 일체가 된 장식으로 3차원의 입체적 형태로 구성시키고 있으며, 용솟음치는 곡선으로 작품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조화로 이끌어 간다. 「민중의 집(Maison de Peuple)」(1898)(역주 ④)과 「솔베이 저택」(1900)등, 수많은 아르누보양식의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만년에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브뤼셀예술학교 교장이며, 남작이라는 영광된 작위도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이후, 철근콘크리트를 써서 고전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면서 아르누보양식에서 새로운 양식으로의 이탈을 시도했으나, 거기서 얻은 쓰디쓴 경험을 은유적으로 "어제의 가치는 오늘의 가치가 아니다"라는 독백을 남기고, 새로운 표현양식을 찾아내지도 못한 채, 1945년 노건축가의 절망을 나타내 주듯이, 그의 방대한 자료 약 80Kg을 휴지화시켜 그 스스로의 손으로 처분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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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Van de Velde : 1863-1957 : 벨기에 

"새로운 건축을 창조하는 사람은 기술자들이다." 

플란더스지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반 드 벨트는, 초기엔 오히려, 회화와 음악,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화가를 지망했던 그는 1881-83년 안트워프 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아울러 1884-85년에는 파리로 가서 까롤뤼스 뒤랑(Caro-lus Duran)의 문하에서 회화를 계속 공부했다. 반 드 벨트는 인상파 화가들이라든지 상징파 시인들과 친교를 맺게 된다. 귀국 후, 1889년 「레 벵(Les Vingt;20세기)」라는 진보적인 예술가 그룹에 참가하여,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예술공예운동을 알게 되며, 모리스의 사상에 공명(共鳴)하기에 이른다. 1893년 「레 벵」 전람회에선, 회화대신 타페스트리를 출품하게 되었다. 반 드 벨트가 건축가로 전향한 것은 1894년 결혼 후 자택을 짓게 되면서였다. 모리스의 「빨간 집」과 비교되는 「블뤄 멘베르프(Bloemenwerf)」라 이름 붙여진 그의 자택에서 건물설계에만 머물지 않고, 가구, 카펫트, 커튼에서 식기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전통적인 형태모방에서 벗어나, 합목적성이 있는 종합적 디자인화 시켰다. 그의 자택에 매료된 미술상 빙그는, 자신의 점포 실내장식을 반 드 벨트에게 의뢰하였으며, 그 ? 
°糖?아르누보라 불렀다. 이러한 경위로 반 드 벨트는 아르누보의 대표자로 지목되게 되었다. 

1899년 베를린에 부임하여, 실내장식이라든가 건축설계에 종사하며, 독일의 공예개혁에 공헌했다 그 중에도 1906년 바이마르 공예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여, 교육과정상의 체계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가 확립시킨 커리큘럼은 후일 디자인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후,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 : 약칭 D. W. B)' 참가했다. 여기서, 개성을 주장하는 반 드 벨트와 규격화를 주장하는 무테시우스 사이에 전개된 논쟁은 잘 알려져 있다. 제1차대전후, 그는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서 교육과 집필활동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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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gnar Ostberg : 1866-1945 : 스웨덴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건축이란, 새로운 예술가와 가치 있는 국민성에 의해 창조될 때에 비로소 '우리들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외스트베르그는 졸업 후 10년간, 즉 1890년대는, 건축가로서, 작업을 시작하기 전의 충실한 탐색과 연구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 주로 이삭 구스타프 클라슨(Isak Gustaf Clason)의 문하에서 일하며, 스웨덴 전국을 열심히 여행하며, 스케치와 실측을 했다. 1893년에는 미국을 찾아, 시카고에서 개최되고 있던 콜롬비아전람회를 견학하면서, 시카고파인 루이스 설리반의 건축에 흥미를 느꼈다. 이 90년대 말기엔, 가장 귀중한 경험이었던 왕립아카데미의 장학금을 얻어, 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 여행은 1896년에서 99년의 3년에 걸쳐 이뤄져,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를 돌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고전건축의 원류에 접해, 보다 본질적인 것을 지향하는 작품으로 반영되었다. 외스트베르그의 건축활동은 1900년부터 시작된다. 1901년에서 2년에 걸쳐 지어진 몇 채의 주택에는 유겐트 스틸(Jugent Stil ; 아르누보를 독일어 사용권에서 이렇게 불렀다)의 영향이 보인다. 그 시기 이후, 「스톡홀름청사」로 발전한다. 엘드그반지구에 재판소 설계경기에 참가하여 몇 번의 경합을 거친 후 1906년에 실시 설계권을 얻게 되었으나, 나중에 재판소가 다른 지구! 
로 옮김에 따라, 대신 시청사를 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운명적인 계획 변경에 의해, 외스트베르그의 대표작이자 당대 스웨덴의 대표적 건축이 된 「스툭홀름시청사」(1923)가, 최초의 스케치로부터 22년의 세월이 지나 완성케 되었다. 이 건축은 1800년대의 고전주의로부터, 아르누보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뛰어넘어, 지역적 특성과 국민적 특성을 발전시킨 민족적 낭만주의양식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건축은 서정시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건축을 인식했지만 그것을 추종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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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tor Guimard : 1867-1942 : 프랑스 

"논리성과 관련된 감정은 동시에 이두가지를 서로 어울리게 하며 정념(情念)에 의해 최고의 예술표현으로 이끌 수 있다." 

기마르의 수업시대의 경력에서 중요한 것은, 1885년에 파리미술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3년간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수업했다는 것, 그리고 자격증을 취득하지 않은 채로, 1889년 미술학교에서 퇴학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하여 건축가로서 동시에 현장인부로서 실무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를 보다 실천岵?건축가로 성장케 했다. 기마르는, 「셍장사원」의 건축가이자, 뷔올레 르 뒤끄의 제자였던 보오도에게 영향을 받아 뒤끄의 찬미자가 되었고, 1895년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여행하여, 빅또르 오르따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1890년대는 뒤끄의 영향이 채 소화되지 않은 채로 작품을 만들었으나 릴抵볘?벨랑제」(1894-1907)의 설계에 있어 장식적 요소로서 아르누보양식이 나타나며, 1890년대 말로부터 1914년의 제1차 대전까지 사이에, 순수한 아르누보양식으로 성숙해 가다가 돌연히 네오 로코코 혹은 네오 바로크 양식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자유로운 형태로 뚫린 창, 거친 돌과 매끈한 돌과 몇 가지의 벽돌, 옆으로 전개된 장식대와 테라코타와 파이양스자기타일 등,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조합시킨 기? 
떳?특유의 픽춰레스크한 수법은 오르따건축의 장식이 인간의 동선과 평면계획과 일체 되도록 처리되어 있음에 대하여 보다 표면적이 장식성이 강조되어 있다. 거기에는 기마르 특유의 표현성과 함께 아르누보건축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위험성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20세기 초두의 근대건축운동에 의해, 보자르의 절충주의건축과 함께 배척해야 할 건축으로 취급되었다. 

파리 지하철의 역사(1899-1905)는 건설을 서두르기 위해 유리와 주철로 모듈을 설정하여, 그가 의도했던 구조와 장식의 일체화에 성공하고 있으나, 1904년에 계획되었던 파리 오페라좌 앞역은 아카데미파의 반대에 직면하여 계획이 중지되었다. 

이 시기를 경계로 공공시설의 일거리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아르누보에 대한 뿌리깊은 반동에 따라 만년엔 파리를 떠나 뉴욕에서 생애를 마쳤다. 



Frank Lloyd Wright 1867-1959 : 미국 

"위대한 건축은, 인간이 위대하다는 가장 위대한 증거다." 

라이트는 20세기 미국에서 태어난 건축의 거장이다. 그는 자연의 생명과 조형 속에서 그 철리(哲理)를 찾아내어, 그의 건축이념을 확립했다. 라이트는 이를 스스로 '유기적 건축(Organic Architecture)'이라 부르면서 생명력 넘치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기계를 부정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속된 기계문명에는 철저하게 반항했으며, 도시를 혐오했다. 끝간데 없이 광활한 아메리카라는 대지에서, 그 자연과 융합하고, 하나가 되어야 할 건축은 대지에 밀착한 '초원주택(Prairie House)'로 실현되었다. 이는 아울러 버리이어티가 풍부한 '유소니안 주택(Usonian House)'로 전개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선 잡목이 우거진 숲속에 우뚝 솟은 한 그루 거목인 양, 수직성을 보여주는 건축도 창작했으나, 수직성을 강조한 건물이든 수평이든 간에 그 어느 것도 공간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 개체가 전체를 위해 봉사한다는 미국적 모토를, 공간구성상의 표적으로 삼은 라이트의 작품은 공간간의 상호관입에 의해 매력적인 조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스승인 설리반과는 달리, 기하학적인 형태를 조형의 기초로 삼아, 교차하는 직사각형에서, 정삼각형, 정6? 
▤活?거쳐, 원형과 나선형 등을 시험했다. 라이트는 1893년, 설리반의 문하를 떠나 독립하여, 「윈슬로우 저택」(1893), 「마틴 저택」(1904), 「쿤리 저택」(1908), 「로비 저택」(1909) 등의 걸작 주택을 내놓아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물어, 주택작가로서 그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낙수장」이라 이름난 「카우프만 저택」(1936)은 그의 최고걸작 주택작품이다. 주택 이외에도「라킨」빌딩(1904)과 「유니티 교회」(1906)를 필두로, 「존슨왁스사」의 여러 건물군(1936-39), 「프라이스타워」(1953-63), 「구겐하임술관」(1956-59), 「가린 군청청사」(1959-63)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1910년대 일본을 여행하며, '임페리알호텔'(1915-22)을 위시하여 「야마무라저택」(1918-25), 「자유학원」(1921) 등의 작품을 일본에 남겨 놓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라이트는 설리반의 슬로건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Form follows function)」을 전개시켜 "형태와 기능은 하나다.(Form and function are one)"라 말로 바꿔 그의 건축론의 골격을 삼았다 



Charles Rennie Mackintosh : 1868-1928 : 영국 

"예술가는 스스로 적절한 표현과정을 창조하기 위해서, 기술적 발명의 재능을 갖고 있어야 한다. 특히 자연이 그에게 부여한 요소를 변환하기 위해서, 발명의 재능이라는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이미지를 구성한다." 

모리스의 '예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에 자극되어 일어난 아르누보는 모리스의 모국인 영국에서보다는 오히려, 바다를 건너 유럽대륙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융성함의 절정에 다다랐다. 

그러한 배경중에서, 스코틀랜드인 맥킨토쉬의 업적은, 영국 아르누보로서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맥킨토쉬는, 스코틀랜드 예술학교를 졸업하고, 1890년에 장학금을 얻어,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유학했다. 이 증축공사는 1898년부터 1909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맥킨토쉬의 명확한 평면계획과 간결한 디자인은 멀리 유럽대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직선과 직각을 기조로한 그의 작품은, 간결玖庸??아름다움과 섬세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덧붙여진 밝은 색조와 더불어, 음악적, 수학적이기도 하다. 클랜스톤에서 몇 가지 다방의 가구 및 실내장식을 통해 맥킨토쉬가 보여준 아르누보풍의 우아한 디자인은, 영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는 않았으나, 1892년 「스튜디오(studio)」지에 게재되어, 유럽에서, 특히, 비엔나의 제제숀니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00년, 같은 글래스고우예술학교 학생이었던 마가렛 맥도날드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언니인 프랜시스 맥도날드도 전년에 건축가 허버트 맥네이르(Hebert Macnair)와 결혼했다. 이러한 4인의 협동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게 되어, '글래스고우파(the Glas-gow School)'혹은 4인조(the Four)'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4인조의 협동작업은 1896년에 시작하여 1898년에는 4인조가 해산되어 버린다. 글래스고우예술학교의 증축부 외에 동도서관(1907-09)과 글래스고우 교외에 컨츄리하우스 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공예가, 화가로서의 업적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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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Behrens : 1868-1940 :독일 

"자연이 지닌 합법칙성이 직접적으로 문화를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구조는 그대로 예술을 의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절대기에 대한 동경은 더욱더 우리들의 가슴속에 차고 넘친다. 단순한 정확성만으로는 영원히 우리를 만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베렌스는 처음엔 화가, 공예가로서 명성을 얻으려 했다. 칼스루에와 뒤셀도르프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며, 1893년엔 뮌헨 제제숀의 창시자 중 하나가 되었다. 1899년에는 예술을 장려했던 헤센공국(公國)의 대공 에른스트 루드비히(Ernst Ludwig)에게 초대되어 다름슈타트 예술가 촌의 일원이 되었다. 베렌스가 건축가로 변신한 것은 이 시기로서, 우선 자택을 지었다. 이것은 아르누보양식적인 것이었다. 1903-07년 베렌스는 무테시우스의 요청으로 뒤셀도르프예술학교의 교장으로 근무하면서, 동시에 그의 건축가로서의 지향하는 바를 굳혀 갔다. 그는 수학적 엄격함을 지닌 기능성을 추구하던 '구조파(구조합리파 : Structural Rationalism)'의 주도자 중 하나가 되었다. 구조파의 거장으로서 그의 활약은 '알게마인 전기회사(Allgemeine Elekfrizitats Gesellschaft, 흔히 A. E. G로 약칭한다.)'의 예술고문이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A. E. G의 수많은 공장 건축을 설계했으며, 1909년에 완성시킨 터빈공장은 그 대표작이다. 근대건축의 선구적인 작품인 이 공장은, 기능성, 합리성이 철저히 추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우아한 예술적 품격도 갖춘 격조 높? 
?작품으로 통합되었다. 베렌스가 화가, 공예가로서 출발했던 그 소양이, 공장건물에서도, 기품 있는 작품을 이루게 했음에 틀림없다. 베렌스가 A. E. G공장에서 의뢰 받은 과제는 단순히 공장건축설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카탈로그, 팜플렛, 포스터, 포장지 등의 디자인에 이른다. 그는 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므로서, A. E. G의 이미지 향상에 성과를 올렸으며, 기술이 인간성을 풍부히 하게 하는 그 실천적 성과로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르꼬르뷔제 등 근대건축의 거장들이 그의 제자로서 근무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Charles Sumner Greene, Henry Mather Greene : 1868-1957 : 1870-1954 : 미국 

"건축은 아무리 디테일이라 주장하더라도 감성에 따라 형태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성에 따라 지배되어야 할 것이다. 완성된 건축엔 풍부한 감성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형 찰즈 섬너는 미주리주 센트루이스에서 태어났으며, 헨리 매서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그린 형제는 함께 센트 루이스 공작고등학교(Manual Training High School)를 거쳐,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그들은 보스턴에서 따로 따로 설계사무소에서 근무했다. 1893년, 부모들이 살던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북부 파사데나를 찾은 형제는 그대로 그곳에 정착하여 공동으로 설계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린 형제의 건축업적의 대부분은 이곳 파사데나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그린형제의 대표작품은 1908년 준공된 「플랙커 저택」과 「솔센 저택」 이때, 이듬해 1909년 「갠블 저택」과 「프란트 저택」등이 있다. 이 모두는 주택건축물로서, 독특한 목조건축이자, 후일 캘리포니아 방갈로(California Bungalow)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 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보급될 스타일을 확립시키게 되었다. 모든 부분이 목제(木製)이며, 극히 질이 높은 이들의 주택은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는 예술작품의 경지에까지 고양되어 있다. 

주택의 모든 부분이 손 작업에 의한 것이나, 한껏 섬세한 디테일에 관해서 말하더라도, 단순히 장인의 감각적 처리에 의해 이뤄진 것만은 아니다. 디테일 전체에 관련된 그린 형제의 정교한 설계가 행해져, 그 도면 그대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조합된 주택으로 마감된 것이다. 

특히, 입면에서 보이듯이 그린 형제는 일본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것은 완만한 지붕구배와 길게 돌출된 처마, 커다란 개구부를 지적한 것만이 아니라 이음 조립방식에 까지 이르고 있다. 

서구건축의 특징이라할 못을 거의 사용치 않고서, 목재에 구멍을 내고 나무못으로 연결하는 수법은, 일본의 황실도 목수에 필적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린형제는 가구는 물론, 카펫트와 스테인드 글래스 게다가 식기류와 조명 기기에 이르기까지를 주택에 어울리도록 디자인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주택전체에 고귀한 고전작품과 같은 향취를 주고 있다. 공예학교라는 수공예에 주안을 둔 특이한 조형교육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Hans Poelzig : 1869-1936 : 독일 

"예술가는, 흙덩이 한 조각에서도 이끌어 낼 수 있는 한, 그의 상상력의 소산을 이식할 수 있는 수단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을 덧붙여 자신이 만들어 놓을 것을 현재 생활에서 이뤄질 수 있을 수준에까지 끌어들이려 한다." 

포엘찌히는, 멘델존과 타우트와 함께, 대표적인 표현주의(Ex-pressionism) 건축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황폐해진 독일에서 씩씩하게 부흥하고자 했던 그들의 조형은 표현파를 이루게된 것이다. 포엘찌히는 1893년 베를린 샤르롯텐 부르크공과대학을 졸업하고, 1900년에 브레스라브 아카데미의 교수로 취임, 1903-16년에는 교장으로 근무했다. 이 무렵의 작품인 보젠의 「급수탑」 르반의 「모리츠미르히사 화학공장」(1911-12), 브레스라브의 사무소(1912) 등은 아직도 어딘가 즉물적인 작풍을 보여주면서도, 후일의 표현주의를 예측케 하는 것이었다. 제1차 대전후 즉, 1916-20년에는 드레스덴의 건축기사가 되어, 짤쯔부르그 「훼스티발 홀」계획안(1920-21), 베를린 「마커스 라인하르트 극장」(1919)으로 대표되는 화려한 표현주의 작품을 설계했다. 이들은 포엘찌히의 대표적 걸작일 뿐만 아니라, 포엘찌히가 단순히 건축가로서만이 아니라 무대미술가로서도 일류작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업적이기도 하다. 짤쯔부르그 「훼스티발 홀」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제1에서 3에 이르는 계획안이 갖고 있는 환상적 조형을 통해 포엘찌히의 상상력이 얼마나 풍! 
부했는가를 살필 수 있다. 또, 「마커스라인하르트 극장」은, 그 내부의 개조를 그가 담당한 것이었다. 마치 종유동처럼 마감된 「입체적 동굴」은 무대 미술가로서 포엘찌히가, 원형무대 위에서의 연기를 편리하게 하고자 고려했던 것이다. 이 대단하고, 드라마틱한 대공간의 구성중에 그의 건축조형상의 진수를 볼 수 있다. 1924년 이후, 포엘찌히는 베를린공과 대학과 아카데미의 교수로 근무했다. 건축작품 이외에도, 무대장치로서, 카렌 감독의 영화 「고렘」(1919)과 「프라하의 대학생」(1913)의 셋트를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 건축적 업적으로는 베를린의 「캐피탈 시네마」(1925), 프랑크푸르트의 「I. G. 파벤연료회사사옥」「베를린 방송국」등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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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olf Loos : 1870-1933 : 오스트리아 

"일반적으로 장식이 없는 상태가 실현된다면, 인간은 8시간은커녕, 4시간만 일해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노동의 절반이 장식에 대해 할애되고 있기 때문이다. 장식은 노동력의 낭비이며, 일찍이 늘 그래왔듯이 건강을 낭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제 재료의 낭비이며, 자본의 낭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장식의 배제는 정신적 강인함의 표식이다. 근대인은 과거의 문화와 이국의 문화가 지닌 장식을 멋대로 이용하고 있다. 이제, 근대인은 그들 특유의 창의성을 장식이외에 것에 집중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로스는, 1893년부터 3년간 미국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로스는 미국 근대건축의 초창기, 시카고파의 혁신적인 건축에 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비엔나로 돌아온 로스가 그곳에서 본 것은 유럽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아르누보와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의 장식적인 경향이었다. 로스는 이것에 반기를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카고파의 거장 설리반의 "우리가 찰나적인 장식을 버리고, 적나라한 그대로의 형태가 지닌 아름답고 쾌적한 건물을 짓고자 한다면, 우리들로서 최량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교훈과 바그너의 근대적인 기능론을 바탕으로 로스는 독자적인 근대성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그것은 미적 순수주의로도 불릴 수 있을 것이며, 장식을 죄악시하는 급진적인 사상으로 귀결되었다. 로스의 건축사상은, 「칼러저택」(1904)과 「슈타이너저택」(1910)에서 구체화되었다. 특히「슈타이너저택」은 철근콘크리트로 건설된 최초의 개인주택 중에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근대건축사의 전기를 이룬 작품이다. 로스는 장식을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건축의 자유파(Free School of Architecture)」를 1906년에 창설했다. ? 
?1908년에는 「장식과 죄악(Ornament and Verbrechen)」을 간행하여, 그의 합리적의 건축론을 피력했다. 장식을 거부한 작품은, 순수하고 명료한 사상과 높은 수준의 상징들이며, 우수한 조형의 미적 가치는, 그것이 표현하는 유익함의 정도와, 각각의 부분이 내적으로 확고히 통일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외에 「뮬러저택」(1930) 등의 주택과 시카고, 트리뷴지 사옥 계획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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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sef Hoffmann : 1870-1956 : 오스트리아 

"우리는 대중, 디자이너, 장인간에 질 좋고 소박한 가정용품을 창조하고자, 친밀한 관계를 형성케 하고 싶다……. 가령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그림을 사들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우리들의 도시·집·방·카펫트·집기·보석 게다가 우리의 말과 감정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단순한 양식으로서, 우리시대의 정신을 표현하는데 실패하려 한다면 우리는 조상들로부터 아득히 먼 배후에 낙후된 채로 남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허위로 모든 약점에 관해 우리를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호프만은 비엔나예술학교에서 바그너에게 사사한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신뢰받던 인물이었다. 1897년 조셉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 1867-1908) 등과 「비엔나 제제숀(Vienne Sezession)」운동을 일으켰다. 바그너 근대건축의 가르침에 자극되어 일어난 운동이었으나, 영국의 글라스고우파, 벨기에와 프랑스의 아르누보의 영향도 커, 바그너학파 보다 더 급진적인 근대주의를 목표로 했다. 또, 호프만은 공예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1903년, 콜로만 모제르(Koloman Moser ; 1868-1918)와 함께 수공예 방식을 답습한 「비엔나 공방(Wienner Werkstäptte)」을 창설하였으며, 건축설계와 수많은 공예품을 제작했다. 그의 활동은, 아르누보양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던 유럽 각지에 예술적 지침을 제공했던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의 대표적 걸작은, 브뤼셀에 있는 「슈톡클레저택」(1905-11)이다. 이 작품은 간결한 정사각형들이 조합되어 구성되었으며, 벽체는 대리석이 쓰였다. 건물의 모서리는 어두운 색의 얇은 동판이 감싸고 있다. 거의 장식이 없는 이 작품은 합리성의 추구를 제1로 삼고 설계된 근대적인 작품이면서도, 시정이 풍부한 우아함? 
?넘치고 있다. 그밖에 비엔나 교외의 사나토리움(1903)과, 쾰른에서 개최된 독일공작연맹전시회의 오스트리아관(1914)을 필두로 많은 주택작품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다 합리주의적 이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면서도, 매우 낭만적인 향기를 풍기는 작품이다. 근세기초 무렵의 근대운동으로서 중요한 비엔나 제제숀도, 호프만으로 대표되듯이 감미로운 표현을 동반한 것이었다. 



Robert Maillart : 1872-1940 : 스위스 

"구조기술자는, 완전히 자유롭게 그리고 문제를 전체적으로 고려하퓐關? 재료를 그 극한까지 이용할 수 있도록, 낡은 건축재료의 전통에 지배되던 형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바로 그때, 우리는 자동차와 비행기의 경우처럼, 새로운 재료에 적합한 새로운 양식에 도달할 것임에 틀림없다." 

마이야르는 구조기술자다. 특히 철근콘크리트로 독특한 마이야르식 가교(架橋)방식을 실현시켜 수많은 교량을 건설했다. 그는 교량건설사상 현저한 업적을 거두었다. 쮜리히 공과대학에서 구조기술자로서의 수업을 쌓은 후 졸업. 그후 여러 구조사무소에서 근무하고 1902년 독립했다. 1911년 모교 쮜리히공과대학의 강사가 된다. 이듬해 러시아에서의 공사를 위해 스위스를 떠났으나 혁명 때문에 빈털터리가 되어 귀국했다. 1919년 쮜리히에서 또 1924년에는 베른과 쮜리히에서도 구조사무소를 열어 활약했다. 마이야르는 교량건설만으로서가 아니라, 건축적 성과물도 평가해야 할 것이 있으나, 역시 압도적이 수요는 교량건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01년 앙가딘느강의 이곳저곳에 40여개에 이르는 철근콘크리트다리를 건설했다. 이들 필두로 차례차례 교량을 건설해갔다. 중요한 작품은, 베른의 슈반트베퍼교(1933) 쮜리히의 테스교(1934) 겐프의 알베교(1936) 그리고 1938년에 설계되었고, 1952년부터 4년에 걸쳐 건설된 쥬네브의 엘교 등이다. 이들은 모두 구조적 경제성과 내구성이 추구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아울러 조형상 미적 조화로 충분히 검토된 ! 
것이다. 마이야르의 교량은 제각기 높은 취향의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건축적 업적으로는 1910년 무량판구조(flat-slab construction ; 無梁板構造)를 고안하고 실현시켰다. 「티앗슨창고」(1925)는 그 대표적인 보기다. 창고와 공장 등의 건축에서는 실내에 보가 늘어지는 결점을 해결하고자 한 목적으로서, 보가 없는 슬라브가 직접 철근콘크리트 기둥에 접속되도록 설계했던 것이다. 이 구조는 주두부가 버섯모양으로 부풀어 있기 때문에 흔히 머쉬룸(Mushroom)구조라고도 부른다. 스위스 전람회장의 「시멘트파빌리언」(1939)도 중요한 작품이다.